2009년 06월 12일
[만화] 가부쿠몬 1권 (내용 언급 주의)
11일 신작목록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어머 이건 사야해+_+ 했습니다.
가부키를 다룬 만화라니, 생각해보면 왜 이게 지금까지 안나왔는지 이상해요. 숱한 전문 직종은 물론 연극이나 노 등 예능을 다룬 만화는 쌔고 쌨는데 왠지 가부키를 다룬 만화는 지금까지 못봤던 것 같아요. 울 나라에 안들어왔을 뿐일 수도 있지만요; <내일의 왕님>이나 <타임슬립 닥터진>에서 가부키가 살짝 곁다리로 나오기만 해도 가슴 두근거렸는데 이렇게 가부키로 가득찬 만화를 보니 아아.. 보는 내내 황홀하더라구요.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아까울 정도였어요ㅠㅠ
그리고 작가분이 군계의 다나카 아키오씨잖아요. 사실.. 군계는 본 적이 없습니다만(퍽) 이름은 익히 들었던 데다가 그림을 잘 그리시는 분이잖아요. 가부키의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잘 묘사할 거라 생각했어요. 직접 보니.. 아아.. 멋져요.ㅠㅠ
가부키에는 미에(見得)라는 독특한 표현이 있어요. 무대를 한번이라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어떤 동작을 취하다가 순간적으로 정지동작을 취하는건데요, 최고조의 순간에 우뚝 정지해서 아름답게 보이는 고정된 상을 만들어내는거예요.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습이죠.
이 만화의 미에는 수묵화입니다. 만화의 컷으로 연결되는 가부키의 동작을 보다가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감각적인 수묵화에 멍-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오직 배우만 보이는 순간- 배우가 무대 위에서 발하는 그 미에의 효과를 지면 위로 옮겼다고 할까요.
이 작가분이 원래 수묵화를 애용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부키의 그림같은 동작들을 만화로 그리는데 있어서 어찌보면 난관일 수 있는 미에의 차별화를 펜선->수묵의 전환으로 표현한게 정말 탁월하다 싶더라구요. 그리 남발되지도 않구요. 미에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카타(型:일정한 동작이나 자세)에도 쓰입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가부키 배우들의 얼굴을 꽤 사실적으로 묘사하더라구요. 두껍고 강렬한 분장을 그리느라 캐릭터의 원래 얼굴이 실종되는 일도 없고, 배우가 늙으면 늙은대로 분장 뒤의 주름과 나잇살들을 그려넣는데 온나가타(여자역을 하는 배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각진 턱이나 굵은 목 등 남자의 느낌을 숨기지는 않아요. 실제로도 60 넘은 남배우가 무대 위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을 연기하곤 하기 때문에 이런 묘사들이 현실적인 느낌이라서 좋았어요.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번역입니다. 고어와 독특한 리듬으로 이루어져서 현대 일본인들도 못 알아듣는 가부키의 대사를 우리의 옛 경성말로 옮기는 센스라니요! 예를 들자면 상연작품 <스케로쿠>에서 스케로쿠의 첫 등장 장면의 대사 번역은 이렇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물들은 이 내 몸 다셧군데.
네 거리 뒤헤 찻집에서 젓고 적시나니 비의 미노와에 브는 찬 봄바람.
처엄 관례를 치른 애솔. 솔 가장자리 훤칠한 니마. 방죽 8가 바람 브나니.
매얄하는 약조에 나봇기난 소믜의 님자 그리샤.
여긔 스케로쿠 아프로 가나니 흥치랍기~ 가히 없도다."
여기에 아래아 한글도 잔뜩 들어가 있어요. 하지만 쫄 필요 없습니다. 대사 밑에 괄호를 넣어서 현대어로 풀어주거든요; 이것도 원판을 그대로 따른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내용 속에 등장한 가부키 작품을 해설하는 페이지를 따로 넣어서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가부키에 관심있는 저에겐 마른 하늘에 단비와도 같은 만화였어요.ㅠㅠ
1권에 나오는 가부키는 <스케로쿠>, <세명의 키치사>, <테라코야>, <간진초>, <카츠요리코이히메스와코> 인데 이걸 만화로 보는 것도 즐겁지만 가부키 명문가의 적통 나카무라 소타로의 전통 가부키와, 그저 그런 집안 출신 햇병아리 배우인 주인공 신쿠로의 파격적인 가부키로 각각 맛보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연극만화의 정석이랄 수 있는 '수재와 천재의 대결'을 가부키 무대에 옮겨놓으니까 어찌나 흐뭇하던지요^^
천재 신쿠로는 실제로는 없는 잘린 목과 소쩍새들을 연기만으로도 관객들 눈앞에 현현시킬 정도로 그 능력이 키타지마 마야와 맞먹는 캐사기급 캐릭인데요, 그를 지켜보는 소타로는 몇백년간을 이어온 전통에 속박되는 연기와 배우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거죠. 신쿠로가 만화주인공답다면 소타로는 가부키 명문가에 태어나 대를 잇는 사람이라면 역시 저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은 현실적인 캐릭터입니다.
문득 이 만화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는걸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일본에서 만화를 드라마화 하는게 대세이기도 하고 가부키 배우가 드라마를 찍는건 드문일도 아니잖아요. 언제까지 사극들마나 영화에서 눈요깃거리로 조금씩 나오는 모습만 봐야 합니까. 본격적으로 가부키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가부키 배우가 제대로 된 가부키 연기를 펼치는걸 보고 싶어요!!!+_+
이쯤에서 캐스팅 망상. :D
나카무라 소타로는 아무래도 진짜 가부키 배우가 맡아야 할 간지인데요(;) 소타로와 똑같은 가부키계의 프린스이며 몇년전에 습명공연도 했고 얼마전에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미스터 브레인 1회에 게스트 출연하여 첫 현대극 연기를 펼쳐서 호평을 받기도 한 이치카와 에비조씨야말로 양보할 수 없는 나이스 캐스팅. 가능성으로는 소타로와 가문도 같고 다방면으로 자유롭게 활약하는 나카무라 시도가 훨씬 높아보이지만 좀 취향이 아닌지라.....;;
왼쪽이 소타로의 스케로쿠, 오른쪽이 에비조의 스케로쿠 (그리고 표정을 따라하는 싱고;;)

이치사카 신쿠로는 전통을 깬다는 캐릭터상 현역 가부키 배우가 연기하기엔 거시기한 면이 있고 해서 일반 연기자가 맡아야 할 듯 싶은데 그러면서도 가부키 연기를 천재적으로 우월하게 소화할 배우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왠지 타키가 대안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

아무튼 제발 이 만화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대박나서 드라마든 영화든 뭐든 실사화까지 되어준다면 금상첨화죠.
그런데 이거 울 나라 사람들에겐 좀 거리감있는 소재다보니 안 팔릴 것 같았는데 홍대 북새통에 가니까 다 나갔다네요? 그래서 그 옆의 툰크서 사긴 했지만.. 좀 아리송합니다. 의외로 나같은 사람들이 많았던 건지 아니면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재고를 갔다놓는걸 잊은건지...; 북새통에 신간재고 없어서 못 산건 처음이라서 기분이 묘하네요.
p.s) 아, 재미있는 건 주인공에게 천재성을 물려준 조상으로 그 이쿠시마 신고로가 나와요! 에도시대 때 오오쿠의 오토시요리 에지마와 스캔을 일으켜 유배를 당한 그 가부키 배우말입니다.(영화 <오오쿠>에선 니시지마 히데토시씨가 맡았지요) 이 사람이 여기선 혼령으로 나와서 주인공을 지켜보면서 아직 한참 모자라는군 뭐 이런 소리 지껄이면서 성장을 기다리더라구요;;
아무튼 한낱 배우면서도 오오쿠의 귀부인과 정을 통한 건 담대한 데가 있고 인기 배우가 섬으로 유배를 당하고 배우인생 쫑친건 극적인 데가 있고...딱히 오오쿠 중심으로 다루지 않아도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쓰는걸 보니까 반갑더라구요.
1권 말미에 에도시대로 타임슬립해서 이쿠시마 신고로의 가부키 얘기가 전개되던데 담권이 기대돼요!
# by | 2009/06/12 23:40 | ●책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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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좀없이 살다가 지난주에 웬일로 밤12시 티비에 무려 고하토가 나오는거 보고 놀라서 붙어앉았었다죠, 참...세상많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그 시커머 죽죽한 화면발은 정말이지 어쩔수가 없었나봅니다;;
건강하시고 잘지내시길.
네, 펜선위주의 묘사는 비슷한데 그림체가 달라요. 이 만화가 좀 더 남성적이에요. 오오쿠가 살짝이라도 언급된다면 재미있겠지만 왠지 가부키 중심으로 갈 것 같은 뉘앙스더라구요; 안그래도 신고로의 공연을 어떤 이쁜 여인이 지켜보고 있길래 앗, 혹시 에지마? 했는데 그냥 기녀더군요^^;;
오오.. 고하토를 TV에서 해주던가요. 하긴 울 나라서 개봉까지 했으니...-_-; 그때도 웬일이야 막 이랬었었죠; 그 블랙과 세피아위주의 어두운 화면색감은 영화의 분위기를 고려해서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 같았어요. 신센구미 제복도 다 검은색으로 바꿔버리고 니시키기 타유마저 검은 우치카게를 입고 등장했고요; 전체적으로 모던한 미술들인데 통일된 색감에서 시대감이 느껴져서 마음에 들더라구요.